어제, 그리고 오늘 새벽까지 서양 문화권에서나 즐긴다는 할로윈 파티를 다녀왔다. 말이 할로윈 파티지 사실 분장 빼고는 다른 파티와 다를 바 없었다. 늘 그렇듯 파티가 맥주나 마시며 친구들과 춤을 추는 자리지만, 이 날 파티는 좀 기분이 묘했다. 파티 전에 있었던 일과 더불어 음... 외국에서 비주류 국가의 외국인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래서 원래 쓰고 있던 글들과, 쓰려고 했던 것들을 제쳐두고 먼저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날 할로윈 파티 전에 2번의 언어 교환 미팅이 있었고, 각각 3시간 반 , 4시간 반씩 진행되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외국어를 써서 그런가 뇌가 꽉꽉 쥐어짜진 수세미가 된 기분이었다. 다 때려치고 잠이나 자고 싶었는데, 기회가 있을 때 놀아야 된다는 마음과 양놈들이 즐기는 할로윈 파티가 얼마나 재밌는지 궁금한 마음이 혼재되어 홍삼 및 각종 영양제를 주워 먹고서 집을 나섰다. 

  파티에 참여하다보면 별 꼴을 다 보는데, 한국에 있을 땐 클럽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이게 클럽의 평균인지 아니면 서양인들의 평균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술에 (거의) 취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엔 파티 안 사람들은 너무나 추접스럽다. "부비부비" 따위의 유아적인 단어로는 그 추접스러움을 설명할 수 없다. 파티는 마치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자신을 중심으로 삼면의 사람들이 모두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흔히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이라서 그런가 여남, 여여, 남남처럼 조합도 다양하다. 더불어 한국 언론에서 숭하다고 난리를 친 k-아이돌들의 춤은 암것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음란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춤을 테이블에 올라앉아 추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집에 가고 싶어 진다. 물론 바 안에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초에 한 번씩은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솔직히 지금까지 파티나 클럽, 바 같은 곳을 갔단 온 후기를 봤을 때, 대체로 "광란의 밤" 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서 나는 정말 클럽 안 모든 사람들이 춤생춤사 댄싱 머신 이런 건 줄 알았다. 각기춤 웃는 광대 춤 무대를 지배하는 댄스 브레이크 이런 댄스파티인 줄 알았는데 그저 외국 버전 덩실덩실 판이었다. 필자는 댄싱보다는 싱잉파라 출 수 있는 춤이라고는 관광버스 춤 밖에 없는데, 이런 스스로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추접 아님 덩실 판이다. 

내가 기대한 외국인들의 춤사위

 

실제로 본 외국인들의 춤

 

그 안에서 선방하고 있는 나

 

아무튼 체력도 정신적인 에너지도 모두 딸리는 상황에서 동행들까지 늦어 혼자 빈 속에 술을 마셨더니 좀 더 센치해졌다. 그래도 결국 동행들과 합류하고 와서 댄스 플로어로 가는데, 늘 그렇듯 내가 아는 노래는 거의 없었고 사람은 많았다. 할로윈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많은 남자 조커들이 있었다. 구렸다. 

  그런데 그런 조커 나부랭이들보다 눈에 띄는 복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던 남자들. 바로 코르셋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바 안에 워낙 추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옷을 입었다는 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코르셋이었다. 그걸 입은 남자들을 보자마자 입을 게 없어서 저걸 주워 입고 앉았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물론 아름다움이 여성의 미덕임을 강요받았던 사회에서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코르셋 때문에 인간적을 삶을 살지 못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에 대한 건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쥐방울 만한 나라에서 현대적인 코르셋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박터지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서로 검열하고 싸우고 치열하게 사유하며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위해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부장의 나라에서, 여성 혐오적인 문화가 싫어 도망치듯 나온 사람으로서 여성 착취의 상징을 입고 신나서 춤을 추는 남자들을 보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니 좋지 않았다. 물론 남자들이 자진해서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응당 여성이 해야 하는 걸 남성이 뒤집어씀으로써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들은 할로윈 파티가 끝나면 분장을 벗고 코르셋과 상관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남은 여성들은 아니다. 모양만 달리 했지 여전히 존재하는 코르셋들과 싸우며 사는 사람들을 한국에서 너무나 많이 봐 왔다. 그래서 여기서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핑계로, 파티니 클럽이니 하는 여성 혐오적 문화에 일조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신차려야 한다.

 

요즘 내 행동은 말할 가치도 없이 부끄러운 행동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곳에 적을 순 없지만 앞서 있었던 두 번의 미팅에서도 말하기는 애매한 조금 슬픈 경험을 했다. 사실 이 날의 진짜 문제적 경험은 다른 것보다는 이 두 번의 미팅에서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여기에 언급하지 않아 글에 핵심이 없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서 말한 코르셋을 입은 남자들을 본 것과 비슷한 맥락의 일이 일어났다. 같은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이 날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핀란드 생활은 반짝반짝 예쁜 비눗방울 안에 들어가, 동동 떠서 동화 속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제 이후로 거품이 팡 터져 다시 바닥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외국에서 즐거웠던 건, 그 모든 짜증나고 답답한 현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이건 핀란드가 안전하고, 사람이 적고,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이나 치안 문제에서 안전했다는 점도 한몫했던 것 같다. 집중해서 듣지 않는 이상 외국어로 된 심각한 이야기는 흘려듣기 마련이고, 다국적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원채도 안 하던 예민한 주제의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할 때에도 좋고 즐거운 이야기만 했지 정치니 사회니 이야기는 겉핥기 수준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제 입이 트고, 외국인들과 얘기하는 게 어렵지 않게 되면서부터 조금 달라졌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이라는 비주류 나라에서 온 동양 여성으로 사는 게 뭔지 점차 깨닫고 있다.

레진 웹툰- 청건, <여자친구>

 

그러니까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는 나와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들, 즉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여성 친화적인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면, 핀란드에서는 한동안 귀를 닫고 교류 없이 지내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외국에 나와 산지 1년이 다 지나서야 조금은 현실적인 시선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나름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저 아무하고도 부딪히지 않고,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우물 안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여전히 한국에는 들어가기 싫다. 핀란드를 떠난다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다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 사이에, 공부하던 본교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만에 들었다. 

 


  여행 이후로 즐거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기대했던 수업은 생각과 달리 실망스러웠고 할만 할 거라고 예상했던 수업은 존나 미친 듯이 빡세 이걸 패스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를 유일하게 위로해 주는 건 이번 달 들어 각각 다른 사람에게 들은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뿐이다. 하하하. 내 얼마 안 되는 학부 시절의 반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에게 가장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정확하게는 영어 그 자체라기보다는 성취감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요즘엔 성취만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 핀란드까지 와서 제대로 하는 거 하나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 좆같은 순간순간들에게서 빠져나가게 해주는 것 같다. 영어 실력이 영 늘지 않는 것 같았고, 어떻게 잘 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할 바도 없었는데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명에게서 확인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잘하고 싶다. 즐거운 순간에는 타인과 함께지만 힘든 순간에는 언제나 나 혼자뿐이다. 그리고 나만이 좆같은 순간에 빠져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에 내가 이룬 것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 게 된 건 좋은 일이다. 

 

10월도 다 끝나간다. 남은 기간도 잘 살아야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 

 

 

다 잘 될 거야라는 의미의 Shaka "Hang loose" -영화 캡틴 마블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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